최근 튼튼앙트스쿨을 OEC 장영화변호사님과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뭘 가르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고, 그야말로 진행(facilitator, coordinator ?)이라서 함께 생각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앙트레프레너십(이하 줄여서 '앙트')이란 무엇인가를 저 스스로도 계속 탐색하고 있습니다만, 창업은 앙트의 한 결과적 형태일 뿐, 동의어는 아니라는 의견에는 저도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만해도 지금 '결과적으로' 창업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만, 창업이란 어떤 우발적 계기의 결과였었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으니까요. 따라서 창업이 모두에게 답이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앙트는 모두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앙트의 조건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란, 자립입니다.
판을 키우고, 혁신을 일으키고, 조직을 만들거나 변화시키는 이 모든 일은 일단 우리들이 자립한 다음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립 없이도 가능했던 2, 3세 사업 확장에 세간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유는, 우리 유전자 깊숙한 어딘가 생물로서 그리고 짐승으로서 '자립에 대한 갈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포유류중에서는 유별나게 장기간의 보육이 필요한 종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다른 영장류들과 비교한 결과를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평균 뇌 용량이 1,330밀리리터인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임신 기간이 실제의 9개월이 아니라 21개월이 되어야 한다.
몸도 못가눌 정도로 태어나는 생명체는 그리 많지 않죠. 대신 부모와 사회가 이들을 자립한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하며, 자립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안고 자립을 하며, 다음을 자립시킬 부모가 되고 사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는 이 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는 학비를 대줘야 하는 것은 물론, 30세가 넘어서까지 엄마가 밥과 빨래를 해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회도 자립을 돕는 역할을 방기하기 시작합니다. 고도성장기 기업이 공채와 연수로 산업역군을 키웠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했지요? 그렇다고 조선시대처럼 촌락주의가 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정서적 스트레스만 남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 자립이 힘들어집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든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쳇바퀴 안에서 초조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생각과 사상의 자립을 할 여유마저 박탈합니다.
저는 인간으로서 생물로서 지금 우리 모두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립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의 명함 없이 내 힘만으로 얼마나 벌 수 있을까, 팀의 보호 없이 어떤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을까? 학생이라면 부모님의 용돈 없이, 아니 부모님을 조부모님을 지금부터라도 부양할 수 있을까?
목숨을 걸고? 네, 지금 한국 사회는 우리 모두가 그 각오로 자립을 향해 도약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날아오르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해지는 시기에 있습니다. 한국은 성장이 둔화되고 인구구조도 일본보다도 2배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자립하지 않으면,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고 후배들을 더 빨리 자립시키지 않으면, 지속가능 그 자체가 위태롭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미시적 의미에서 회사나 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벌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빨리 뛰어 나가 날아 오릅시다. 저 하늘 아래가 어떤 정글이라도.
끝까지 살아 남았던 것은 안락한 자궁속 임신 기간이 길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아닌 결국 우리 현생 인류였습니다. 그 인류가 지녀야 할 '자립에 대한 본능과 책임'을 현대적 의미로 되찾는 것, 그 것이 바로 앙트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