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왜 기자들은 (질문다운)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답은 사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위기를 깰 용기도 필요도 동기도 없다.
정관계 브리핑에 초청 받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모두 서로 서로 알고 있는 일종의 암묵의 공동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쇼'다라고 누구도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한다.
실제로 그 자리는 대개 일종의 연극이자 약속대련이다.
어차피 그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뻔하다. 보도자료로도 가능한 이야기의 엑스트라가 되어주는 것일 뿐.
그러나 그러한 엑스트라라도 하며 분위기를 맞춰줘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낼 수 있다.
행여 분위기 모르고 엄한 돌발 질문이라도 하거나, 순서/위아래를 모르는 발언을 하면...
누구도 티는 내지 않지만,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 친구는..."
이라는 평판이 돌며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그 공동체에서 제외된다. 이것이 자정작용인지 외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자로서 자기만 손해다.
대신 그 공동체의 이면에서는 쇼나 약속대련과는 무관하게
진짜 이야기가 흐르곤 한다.
저녁에 퇴근길이든, 쉬는 시간 복도이든, 벤치든,
기자가 본능적으로 노리는 것은 언젠가 특종이든 단독이든
어떤 찐한 이야기거리를 건질지 모른다는 희망 탓이다. 하다못해 사실확인이라도 남몰래 해줄 수 있는 끈을 지키기 위해서다.
한국사회에 출입처나 기자단, 기자실과 같은 뻔하고 구시대적인 연극 동아리가 우여곡절을 거치며 계속 유지되는 이유도 이 희망의 구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에게 행정부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란 결국 기자 뿐이다. 두차례 금속탐지기를 통과해야 겨우 알현할 수 있는 관청의 나으리들에게 그나마 자유롭게 접근하여 그들이 무서워 하는 국민의 눈이 되어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러한 부조리가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변인 앞에서 노트북 타자치는 연극에만 열심히, 뒤에서도 실제로 보도자료를 베껴쓰는 것이 전부라서,
어느 언론에서도 비슷한 글만 읽게 된다면,
'충격'과 '공포' 이외에는
어떠한 통찰도 없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쇼의 공동체 이면에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문득,
진짜 기사를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