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이 밝았습니다.
지난 2012년은 정치의 한해였습니다.
어느 선거때보다도 뜨거웠던 까닭은 아마도 각자 "우리 사회의 지금 이대로"에 대한 입장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기득권과 바리케이트 대치를 하기 위한 뜨거움이란 것,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근대화 과정에서 목격되던 풍경입니다. 특히 절대왕정이나 봉건영주처럼 소수로 원한이 모일 수 있다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소수를 향한 분노를 지렛대 삼아 귀족-평민 사이에 두껍게 존재할 수 있었던 시민계층(혹은 부루조아)이 중흥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한반도에는 명예혁명,프랑스혁명이나 메이지유신과 같은 대전환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는데요. 물론 지정학적 외적 요건에 휘둘리던 당시를 고려해야 합니다만, 뿌리깊고 광범위한 양반제 탓에 분노의 초점을 모을 수 없었던 이유도 있습니다. 즉 기득권이 바리케이트 너머가 아니라 옆집아저씨인 곳에서는 혁명의 대상을 규정하기 힘든 셈입니다.
특히 조선말기의 풍조를 볼 때 피를 부르는 혁명보다는 차라리 나도 양반이 되는 길을 끼리끼리 찾는 법이 더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 느끼기 마련인 것이지요.
21세기에 무슨 양반(兩班)이냐 싶지만 문반과 무반이 아닌 대기업반과 공기업반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반(班)에 속해야만 비로소 한국사회에서는 삶의 기반을 갖출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현대적 의미의 사회적 안전망에는 대개 그 국민의 역사가 묻어 있습니다. 북구의 복지를 부러워 합니다만, 스캔디나비아의 기후 및 지리적 여건상, 어려울 때 돕지 않으면 함께 망한다라는 체험이 사회적 정서로 녹아 있다라는 분석을 그들 스스로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기업 의존적 복지는 국가가 컨트롤 타워가 되어 기업을 총동원하여 재건하던 시절, 국가가 기업을 지원하는 대가로 국민 복지를 거래한데서 기원합니다. 즉 국가는 국가발전을 위해 일익을 담당할 산업집단의 성장을 전폭 지원하고, 대신 산업집단은 후덕한 기업복지로 종업원을 감싸 안습니다. '인화'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어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모두가 양반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두자리수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가장이 대기업반이나 공기업반에 속해 모두 양반이 될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하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철탑에 올라 외쳐 봅니다만, 그날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업도 국가도 성장을 멈췄고, 세포는 노화해가며 쌓여가, 새로운 세포가 들어 갈 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기업)노조는 그 보호막의 역할을 했습니다.
정치과잉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만,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은 지도부에 대한 과잉 기대가 아닌 바로, '근대화의 시민혁명'일지도 모릅니다. 네, 신분제의 철폐이지요. 모두가 양반이 되는 유토피아가 찾아 오면 좋겠지만 안되는 일임을 이제는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산업시대 동안 신분제를 유지한 결과, 21세기에 남은 것은 신규 채용의 축소뿐이었으니까요.
- 양반이 독점하고 있던 사회적 안전망을 기업으로부터 분리, 이제는 모두에게 해방시켜줄 때입니다.
- 양반의 지위가 영속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죽지 않는 불사조와 같은 정규직은 한시적 환상이니까요.
양반이 아닌 시민이 되는 그날을 위해, 시민들이 조합을 만들고 (산별)노조를 만들어 가야하겠지만, 이미 스스로 기득권이 되어 버린 정당과 표밭으로부터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랍니다.
목적이 정해진 기계의 치환 가능한 부품의 삶,
이 삶을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하며,
그 이외의 삶은 보이지 않는 세계.
우리 사회의 답답함이란 바로 이 부조리를 환상이 아닌 실현 가능한 현실이라 믿는 착각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