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같은 구태가 반복되는 근원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뿌리 깊은 가부장주의가 정착되고 또 반복된 이유는 결국 한 집단의 성공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20세기를 관통한 고도성장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일이다.
'컨트롤타워'가 핸들을 잡고 관민일체식 드라이브를 하는 일은 60년대 섬유, 70년대 철강, 80년대 조선으로 이어지며 달려왔지만 메모리산업을 마지막으로 종언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이 추억은 강한 관료의 국가를 만드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정보화와 세계화라는 불가역적 대변화의 더블 펀치는 완전히 새로운 21세기를 열어 버리게 된다. 이 시대에 중요해진 것은 정부에 의한 선택과 집중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뻘짓의 얻어걸림'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뻘짓을 여하간의 역사적 경위를 통해 보장해 준 미국이나 북유럽이 이 새로운 시대를 리드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가부장주의란 입법/사법이 행정에 비해 약한 대륙법적 전통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즉 사법소극주의의 나라에서 분쟁을 사후에 조정하는 일을 신뢰하지 않고, 성문화된 제도를 미리 만들고 이를 행정 지도라는 명목으로 사전 규제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정착된 것이다.
지나고 보면 20세기의 고도압축성장은 그 효과의 증명이었다. 그러나 이 재량규제는 부작용도 있었다. 인허가권을 정부가 독점하게 된 결과 일종의 클럽을 꾸리게 된 셈인데, 인허가/신고제로 고정회원제의 경제시스템을 정부가 통제하고 이들과 장기적 관계의 으쌰으쌰를 유지하는 것이다. 정부가 두뇌가 되고 클럽멤버는 몸이 되어 성장한 것이다. 기득권은 그렇게 보장되고 쫓겨나면 큰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관료의 지배는 이어졌다. 게다가 이는 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설상가상 이 체제하에서 현장 이해력이 없는 국회의원은 정책입안과 제도설계를 관료에 방치하게 된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부 기구는 자위 입법을 하게 되고, 복잡 다단하고 임의 재량적인 시행령으로 지배를 강화한다. 정권의 성향과 무관하게 체질은 이미 굳어진 것이다. 아니 왜 법을 관료가 만드는가? 어떤 면에서 한국의 삼권분립은 기능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가가 대변해야 할 선거민및 산업이해당사자들의 더 중요한 이슈는 침몰하게 된다.
이 폐해는 이미 여러모로 두드러졌다. 국제 경쟁력이 없는 특정 국내 산업이 시장 원리와 무관하게 온존하게 되었으며, 국내적으로는 결국 기업집단(재벌)의 형성을 도왔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통상마찰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공인인증체제에서 위피, 샾메일로 이어지는 작금의 IT업계의 삽질은 드라이브할 곳을 잃은 이 전통이 IT업계에서 국지적으로 소진되고 있는 것인 셈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는 따라가야 할 모델이 있는 시대가 아니다. 국가 규모로 핸들을 틀어 대규모 자원 투입이 가능한 시대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걱정거리는 자원을 확보/동원 못해 성장기회를 잃는 일이었다. 다행히 미국의 안보 우산은 원자재 확보를 도왔고, 가공할 교육열은 양질의 인재를 대량 수급해 주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에 있어 진정한 걱정거리는 자유로운 소수가 발휘한 씨앗을 발견하지 못해 방치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걱정은 누가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